5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이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월은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든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 (실료 애정 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종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축복 (祝福) 용혜원 밤하늘에 별들이 한낮의 태양이 나를 위하여 빛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길거리에 가로수들이 밤거리에 가로등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지구가 온 우주가 나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감격할 일인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나의 살아감을 위하여 준비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오늘 이 순간에도 내가 살아가는 것은 심장이 박동치는 생명의 힘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된 일인가…
어머니를 그리며 신사임당 산 첩첩 내고향 여기서 천 리 꿈 속에서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꼬이고 고깃 배는 바다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안자아 바느질 할 꼬 * 신사임당이 서울 시집에 있을 때 고향에 홀로 계시는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시…
봄날은 간다 구 양 숙 이렇듯 흐린 날엔 누가 문 앞에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보고 싶다고 꽃나무 아래라고 술 마시다가 목소리 보내오면 좋겠다 난리 난 듯 온 천지가 꽃이라도 아직은 니가 더 이쁘다고 거짓말도 해 주면 좋겠다. 97인의 詩 모음 <사랑은 詩가 되고 이별은 별이 되는 것> 예담, 2015…
어느 날 나는 어느 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 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 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 날이니까 나의 詩는 어느 날의 일이고 어느 날에 썼다. 김용택, 시집 <울고 돌아온 너에게> 창비, 중에서…
봄나들이 정양 지긋지긋한 이 아파트 말고 어느 산기슭 어느 시냇가에 집 하나 짓고 예쁘게 사는 것이 아내는 소원이라 한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기르고 오가는 새들 모이도 뿌려주면서 채소랑 곡식이랑 감 대추들 다 가꾸어 고맙고 다정하고 가까운 이들과 골고루 나누고 싶다고 한다 그런 소원쯤 언젠가 못 들어주랴 싶고 사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산기슭 그런 시냇가를 틈날 때마다 눈여기며 나는 늙는다 먼 길 나다니는 차창마다 그런 산천을 먼발치로 탐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어느새 버릇이 되어 있다 친해지는 건지 철이 드는 건지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햇빛 바르고 물길도 곱고 바람 맑은 곳 혼자서 점찍어보는 그런 그리운 데가 나다니다 보면 참 많기도 하다 점찍어 보는 데가 너무 많은가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아내에게 간 빼낼 재주가 나에게는 영 없는가 간도 쓸개도 뱃속에 있기나 한가 모처럼 아내와 나선 봄나들이 나이 들수록 속절없이 산천은 곱다 꽃 범벅으로 점찍어보는 그리움들이 먼발치로 자꾸 외면하면서 지나간다.
세월이 가는 소리 - 오 광 수 - 싱싱한 고래 한 마리 같던 청춘이 잠시였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서른 지나 마흔 쉰 살까지 가는 여정이 무척 길 줄 알았지만 그저 찰나일 뿐이라는게 살아본 사람들의 얘기다 정말 쉰 살이 되면 아무것도 잡을 것 없어 생이 가벼워질까 사랑이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길 수 있을까 쉰 살이 넘은 어느 작가가 그랬다 마치 기차 레일이 덜컹거리고 흘러가듯이 세월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요즘 문득 깨어난 새벽 나에게도 세월 가는 소리가 들린다 기적 소리를 내면서 멀어져 가는 기차처럼 설핏 잠든 밤에도 세월이 마구 흘러간다 사람들이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하는 마음을 알겠다.…
영원한 봄 정 용 철 봄비가 내립니다 이제 눈은 내리지 않습니다 봄비가 나무를 깨워 세수(洗手)를 시키면 대지(大地)는 화사하게 웃습니다 땅 위에, 땅 아래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이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올라갑니다 이제 우리도 일어납시다 무릎을 펴고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고일어나 위로 위로, 올라갑시다 아이들은 사랑을 더 받아야 하지만, 청년들은 이제 결심(決心)을 하고 어른들은 꿈을 찾아 나서고 노인들은 평화(平和)를 만나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인생을 괴롭히지 마세요 당신도, 어느 누구도 그럴 권리(權利)는 없습니다 당신의 유일(唯一) 함, 마음과 생각은 이미 충분(充分)히 귀(貴) 하고 아름답습니다 봄비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다시 눈으로 바뀌겠지만 당신의 봄은 이제부터 영원(永遠) 할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世上)의 영원(永遠) 한 봄입니다. <좋은 생각, 2017,4월호>중에서…
적하리의 봄 도종환 님이여 당신은 아프게 아프게 제게 오십니다 이 땅에 한 포기 풀로 저를 있게 하시고 모진 바람으로 제 소중한 모든 것들 거두어 가신 뒤에 깊고 긴 어둠으로 오랜 날 덮어두셨다가 언 가슴 안고 울부짖는 소리도 모른 체 두셨다가 풀리는 햇살로 천천히 제게 오십니다 제 살아온 반생의 언덕을 제 손으로 갈아엎게 하시고 굵게 굵게 흘리는 눈물 발등에 넘칠 때 빗줄기를 먼저 보내 조용히 씻게 하시고야 보리밭 위로 조금씩 햇살 던지시며 제게 오십니다 님이여 당신은 먼 밤의 끝으로 이어오는 새벽처럼 오십니다 님이여 당신은 제가 이 땅의 어느 외진 구석에 풀잎으로 있어도 저를 가득 담아두시는 아침 하늘로 오십니다 겨울 산골짝을 고적히 달려간 밤기차의 기적처럼 제 가슴은 크게 울리고 오래도록 남아 있는 푸른 핏줄의 맥박으로 오십니다 쓰라림과 외로움 견디노라 갈라져 터진 껍질 벗겨 맑은 속가지 드러나게 한 뒤 해묵은 슬픔과 함께 태우고 계시는 아아로운 포도밭의 불길로 오십니다 님이여 당신은 멀고 긴 길을 돌아 제게 오십니다 님이여 당신은 제 옆의 늘 푸른 나무들을 먼저 흔들어 보시고 저를 가만히 흔들며 당신 가까이로 오라 하십니다 좀 더 가까이 오라 하십…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 서 남 북으로 틔어있는 골목마다 수국 색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 무슨 일을 하고 싶다 - 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축 복(祝福) 도 종 환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은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이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두운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면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봄 꿈을 꾸며 김종해 만약에 말이지요. 저의 임종때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네. 이월이요. 한 밤 두 밤 손꼽아 기다리던 꽃 피는 봄이 코앞에 와 있기 때문이지요. 살구꽃. 산수유. 복사꽃잎 눈부시게 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 언덕 너머 있기 때문이지요. 한평생 살아온 세상의 봄꿈이 언덕 너머 있어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행복했었노라고요. 김종해 서정시집 <그대 앞에 봄이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