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殘雪) 잔설(殘雪)이 남은 모퉁이에 하트를 그렸다 얼마나 버틸 것인가 눈이 녹아도 없어지고 눈이 더 내려도 사라지고 말 우리네 시한부(時限附)의 삶 시나브로 침식(侵蝕) 되는 잔설이 남아있을 때까지만 사랑은 지속(持續) 될 것이다 싫든 좋든 그게 운명(運命)이다 그게 사랑이다. 공석진 시집<정 그리우면>중에서…
남 편 문 정 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중에서…
새해를 여는 기도 오정혜 받은 상처는 예리한 매스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고 준 상처는 아둔하여 두리뭉실 기억이 없었습니다 나 잘난 멋에 살아온 빈 껍데기였고 나의 관점이 진리라 고집했습니다 남이 나를 칭찬할 때 그것이 나의 전부라 착각했고 남의 허물을 덮어 줄 내 안에 여백이 없었습니다 나 가진 것 너무 많아 교만했고 나 받은 것 너무 많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남을 미워한 것 때문에 내가 더 미웠고 내 것이라 아등바등 할 때 가난해짐을 배웠습니다 나를 부인할 때 내가 누구인지 보았고 내가 죽어야 산다는 것 알았습니다 남을 인정할 때 부유하다는 것 알았고 남이 존재할 때 내가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남이 아파할 때 어미의 가슴으로 눈물 품게 하시고 남이 쓰러질 때 일으켜 세우는 아비의 굳센 팔뚝 되게 하소서.…
선 물 나 태 주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기쁨이겠습니다.…
12월의 기도 이 해 인 또 한 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 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 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양 광 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따뜻한 것이 그립습니다 따뜻한 커피 따뜻한 창가 따뜻한 국물 따뜻한 사람이 그립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조금이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워하는 일일 게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 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립고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 그립다. 돈도 그립고 사람도 그립고 어머니도 그립고 네가 그립고 또 내가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던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자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사람이 그리워해야 사람이다. 양광모, 대표 시선집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중에서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양 광 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따뜻한 것이 그립습니다 따뜻한 커피 따뜻한 창가 따뜻한 국물 따뜻한 사람이 그립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조금이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워하는 일일 게다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 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 그립고 만나면 혼자 있고 싶어 그립다. 돈도 그립고 사람도 그립고 어머니도 그립고 네가 그립고 또 내가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던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자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 사람이 그리워해야 사람이다. 양광모, 대표 시선집 <사람이 그리워야 사람이다>중에서…
가슴 뭉클하게 살아야 한다 어제 걷던 거리를 오늘 다시 걷더라도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나더라도 어제 껶은 슬픔이 오늘 다시 찾아오더라도 가슴 뭉클하게 살아야 한다 식은 커피를 마시거나 딱딱하게 굳은 찬 밥을 먹을 때 살아온 일이 초라하거나 살아갈 일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 진부한 사랑에 빠졌거나 그보다 더 진부한 이별이 찾아왔을 때 가슴 더욱 뭉클하게 살아야 한다 아침에 눈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바람에 꽃이 피어 바람에 낙엽이 질 때까지 마지막 눈발 흩날릴 때까지 마지막 숨결 멈출 때까지 살아있어 살아있을 때까지 가슴 뭉클하게 살아야 한다 살아 있다면 가슴 뭉클하게 살아 있다면 가슴 터지게 살아야 한다 양광모 시집 < 나는 왜 수평으로 떨어지는가>중에서…
가을의 소원(所願) 안 도 현 적막(寂寞)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理由)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 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臨終) 하는 것 초록(草綠)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안도현 시집<간절하게 참 철 없이>중에서…
가을이 시작될 때 김상희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처럼 기분 좋게 미소(微笑)가 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굳이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느낌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떠난다 해도 곁에서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견뎌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좋은 기억(記憶)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에 가을 향기 한가득 품은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오빠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차지한 우리 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 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 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不惑)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어주는 그 헌신(獻身)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라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 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四方)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 버렸다.…
지척(咫尺) 박 제영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아느냐 물으니 당신은 하늘에서 땅까지 아니냐고 대답했지요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잘난 척을 좀 했지요 지척(咫尺) 지(咫)는 여덟 치, 척(尺)은 열 치 한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 지척에 두고 평생을 만나지 못하기도 하는 먼 거리가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했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마음이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라며 잘난 척을 좀 했지요 당신은 웃으며 이렇게 물었지요 당신과 내 거리가 지척인 것은 알아요? 『시담』(2018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