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향[ 偸香 ]:향을 훔친다는 뜻으로, 남녀간에 사사로이 정을 통함을 비유하거나 악한 일을 하면 자연히 드러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偸 : 훔칠 투, 香 : 향 향) [유래] 진(晉)나라의 가충(賈充)의 딸이 향을 훔쳐서 미남인 한수(韓壽)에게 보내고 정을 통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다음은 중국 청나라의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괴이(怪異) 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가충은 진나라 무제(武帝) 때의 권신(權臣)으로, 그에게는 가오(賈午)라는 딸이 있었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손님들과 술을 마실 때면 푸른 발[簾] 사이로 몰래 엿보기도 했는데, 한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사모하게 되었다. 한수의 자(字)는 덕진(德眞)이고, 난양[南陽]의 도양(堵陽)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사도(司徒)인 기의 증손자였는데, 얼굴 모습이 아름답고 행동거지도 단정했다. 가충의 딸은 하녀로부터 한수의 성(姓)과 자(字)를 알아내고, 자나깨나 한수를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하녀는 한수의 집으로 가서 가오의 생각을 전하고, 그녀가 행실이 올바른 사람임을 말하자, 한수도 마음이 움직였다. 드디어 두 사람은 남몰래
漆身呑炭(칠신탄탄) : 「몸에 옻칠을 하고 숯불을 삼키다」라는 뜻으로,복수(復讐)를 위(爲)해 자기(自己) 몸을 괴롭힘(漆 옻 칠/일곱 칠, 삼갈 철,身 몸 신, 呑 삼킬 탄, 炭 숯 탄) [유래] 사기(史記) 진(晉)나라의 왕권(王權)이 흔들리자 세력(勢力)다툼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백씨(知伯氏)는 한가(韓家), 위가(魏家)와 손잡고 조가(趙家)를 멸하려 했으나, 조가의 주(主) 양자(襄子)는 항복(降伏ㆍ降服)하지 않고 저항(抵抗)했다. 지백이 진양성을 쳐 함락시키게 되었을 때, 한ㆍ위가 모반(謀反)하여 지백을 죽였다. 이에 지백의 신하(臣下) 예양(豫讓)이 조카의 양자를 죽여 지백의 원수(怨讐)를 갚으려고 했다. 예양(豫讓)은 미장이로 변장하고 궁중(宮中) 공사장으로 끼여 들어갔다. 어느 날, 예양(豫讓)은 변소에 들어가는 양자를 찔려 죽이려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 이유(理由)를 묻자, 예양(豫讓)은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접(待接)했으니, 나도 국사로서 보답하려 한 것이다.」 하고 대답(對答)했다. 이 말에 양자는 예양(豫讓)을 충신(忠臣)으로 보고 놓아 보냈다. 그러나, 예양(豫讓)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처
유좌지기[宥坐之器]: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가지런히 하기 위한 스스로의 기준을 이르는 말. (宥 : 용서할 유, 坐 : 앉을 좌, 之 : 어조사 지, 器 : 그릇 기) [유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이 공자가 주(周)나라 환공(桓公)의 사당(祠堂)을 찾았다. 사당 안에는 의식 때 쓰는 그릇인 의기(儀器)가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본 공자가, "저것은 무엇에 쓰는 그릇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당지기는,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입니다(宥坐之器)"라고 하였다.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지는데,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선다고 하더군요." 공자의 말대로, '유좌지기'는 비거나 차면 기울고 엎어지지만 적당하면 곧게 서 있을 수 있는 그릇이다. 선인들이 이것을 마음 깊이 간직했던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알맞게 적정선으로 유지하여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조절한다는 평상심의 뜻이 있었다.
초록몽[蕉鹿夢]: 인생의 득실(得失)이 꿈과 같이 허무하고 덧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파초 초, 사슴 록,, 꿈 몽 ] *여기서 ‘초록몽(蕉鹿夢)’은 인생의 득실이 꿈과 같이 허무한 것임을 비유하여 쓰인 말이다.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비교해볼 만하다. [유래]중국 정(鄭)나라 사람이 사슴을 잡아 땔나무로 덮어 감추어두었으나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장소를 잊어버려 찾지 못하고, 그것을 한바탕 꿈으로 체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열자(列子)》 〈주목왕편(周穆王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준조절충[ 樽俎折衝 ] : 술자리에서 적의 창끝을 꺾는다는 뜻으로, 평화로운 교섭으로 일을 유리하게 담판짓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樽 : 술통 준,俎 : 도마 조, 折 : 꺾을 절,衝 : 충돌할 충) [유래] 안자춘추(晏子春秋)〈내편(內篇)〉에 전하는 말이다. 충추전국시대의일이다. 제(齊)나라의 장공(莊公)이 최저에게 시해당하자, 경공(景公)이 그 뒤를 이었다. 최저가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봉하였다. 그리고 최저에 반대하는 사람은 죽인다고 하고 모든 신하에게도 이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 안영만이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임금에 충(忠)이 되고, 나라에 이(利)가 되면 따르겠노라" 하였다. 그뒤 최저가 피살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에 안영이 국정을 맡게 되었는데, 이가 곧 춘추시대의 명재상 안상국(晏相國)이다. 그는 한 벌의 호구[여우털옷]로 30년을 입을 정도의 검소한 청백리였다. 당시의 중국은 12개의 대국을 비롯해 다른 소국을 다 합쳐 100개국이 넘는 나라가 각축을 벌였다. 안영은 이들을 상대로 외교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사람들은 안영이 제나라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고 하
종용유상[從容有常]:얼굴색과 행동에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군자를 비유하는말. (從 : 따를 종, 容 : 얼굴 용, 有 : 있을 유, 常 : 항상 상) [유래]사람이 떠들지 않고 소리없이 얌전한 것을 두고 조용하다고 한다. 여기서 조용은 한자 '종용(從容)'에서 온 것이다. 말 그대로 얼굴을 따른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이상적인 인간상을 일러 군자(君子)라 하였다. 이것을 가장 강조하고 실천하려 애쓴 사람이 공자(孔子)였다. 공자에 의하면 군자는 지식과 수양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군자는 최고의 인격과 선을 갖춘 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그에 따른 제약과 불편함 또한 많았다. 특히 군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의 변화가 얼굴에 나타나면 안 되었다. 얼굴은 인격을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자는 늘 변하지 않는 얼굴색[顔色]을 지녀야 하였다. 이것이 바로 군자의 미덕이었다. '유상(有常)'은 군자로서 변하지 않는 상도(常道)를 말한다. 따라서 '종용유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얼굴색이나 행동거지가 변하지 않으며, 자신의 소신대로 정도(正道)를 걷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공자는 《예기禮記)》 〈치의편(緇衣篇)〉에서…
조명시리[ 朝名市利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市場(시장: 저잣거리)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조정 조, 이름 명, 저자 시, 이로울 리 ) [유래]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전한다.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司馬錯(사마조)는 어전에서 ‘蜀(촉)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一擧兩得(일거양득)’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縱橫家(종횡가) 출신의 재상 張儀(장의)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魏(위)·楚(초)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韓(한)나라의 三川(삼천)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周(주)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九鼎[구정: 天子(천자)를 상징하는 솥]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霸業(패업)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疲弊(피폐)케 할 뿐 무슨 名利(명리)가 있겠나이
절영지연[絶纓之宴] : '갓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거나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름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절영지회(絶纓之會)라고도 한다. (絶:끊을 절, 纓:갓끈 영, 之:어조사 지, 宴:잔치 연) [유래] 이 고사는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 <복은(復恩)>편과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등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이 투월초의 난의 평정한 뒤 공을 세운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총희(寵姬)로 하여금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밤이 되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불현듯 왕의 총희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총희는 장왕에게 누군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자가 있어 그자의 갓끈을 잡아 뜯었으니 불을 켜면 그자가 누군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고하였다. 그러나 장왕은 촛불을 켜지 못하도록 제지하고는 오히려 신하들에게 "오늘은 과인과 함께 마시는 날이니, 갓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자는 이 자리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今日與寡人飮, 不絶冠纓者不歡)"라고 말하였다
곡돌사신[曲堗徙薪] :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미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비유. (굽을 곡, 갑자기 돌, 옮길 사, 섶 신) [유래] 한나라 유향이 편찬한 설원 권문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화근을없애 재앙을 미연을 방지하라는 뜻. 길 가던 한 나그네가 한 집 앞을 지나면서 우연히 그 집의 굴뚝을 바라보았더니 굴뚝은 반듯하게 뚫려 있고 곁에는 땔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그네는 그걸 보고 주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굴뚝의 구멍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땔나무는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십시오."그러나 주인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 큰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해 집 주인을 구해 내었고 다행히 불은 집을 다 태우지 않고 꺼졌다.이웃들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데 대한 감사로 그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과 술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때 한 사람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때 당신이 그 나그네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이 날 일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술과 고기를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하고 땔나무를 옮기라고 말
전거복후거계[前車覆後車誡] : 앞의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가 경계한다는 뜻으로, 선인들의 실수나 잘못이 후세 사람들에게는 경계가 된다는 말. (前 : 앞 전, 車 : 수레 거, 覆 : 엎어질 복, 後 : 뒤 후, 車 : 수레 거, 誡 : 경계 계 ) *“속담에 말하기를, 관리로서 직무를 익히지 못할 때에는 마음을 다하여 지난 예를 조사해 보라는 말이 있다. 또 앞의 수레가 엎어지면 뒤의 수레에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 하, 은, 주의 삼대는 오래도록 번영하였는데, 그 이유는 지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번영을 배워서 얻지 못하는 사람은 성인의 지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鄙諺曰 不習爲吏 視已成事 又曰 前車覆 後車誡 夫三代之所以長久者 其已事可知也 然而不能從者 是不法聖智也].” [유래] 한서(漢書)》가의전(賈誼傳)〉의 이야기이다.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때 뤄양[洛陽]에 가의라는 사람이 있었다. 대단한 수재로 18세 때부터 그 재능이 알려졌다. 20세에 박사가 되었고, 다음 해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가의는 문제를 도와 자주 정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는데,[鄙諺曰 不習爲吏 視已成事 又曰 前車覆 後車誡 夫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인간(人間)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별의 아쉬움을 일컫는 말 [모일 회. 놈 자, 정할 정, 떠날 리] 일생을 살면서 사람은 무수히 만남과 이별을 겪는다. 만날 때마다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삶을 지속할 수가 없기에 안심시키는 말이 많이 내려온다. 산 사람은 필히 사라지고 만나는 사람은 필히 이별한다고 生者必滅 會者定離(생자필멸 회자정리)라 했다
표사유피인사유명[豹死留皮人死留名]: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은 그 삶이 헛되지 않으면 방명(芳名)은 길이 남는다는 말. *이 말은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인재명호재피(人在名虎在皮)'와 같은 뜻이다. (豹 : 표범 표, 死 : 죽을 사, 留 : 머무를 류, 皮 : 가죽 피, 人 : 사람 인, 死 : 죽을 사, 留 : 머무를 류, 名 : 이름 명) [유래]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王彦章傳)〉에 나오는 말이다. 왕언장(王彦章)은 병졸에서 시작하여 후량(後梁)의 태조(太祖)인 주전충(朱全忠)의 장군이 된 용장이다. 그는 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되는 한 쌍의 철창을 들고 늘 주전충의 곁을 따라다녔다. 전투시 언제나 쇠창을 옆에 끼고 적진을 누벼 사람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주전충이 즉위 6년 만에 아들에게 피살되고 그 아들은 다시 동생에게 피살되는 등 양나라(후량)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勖:장종)은 황제가 되어 국호를 당(唐)이라 하고 양나라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왕언장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싸우다가 패해 일시 파면되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