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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연재

일본 고속철도 탄생과 역사(1)

 

1. 협궤에서 시작된 일본철도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개통 50년이 지나 노리모노 뉴스(りものニュース)에서는 어떻게 신칸센(新幹線)이 계획되고, 개통에 이르렀는가를 아카노 카츠토시(赤野 克利) 씨가일본의 고속철도 그 탄생과 역사에 대하여 연재(2014820일 연재개시)한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서문

2014 10,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도쿄(東京) ~ 신 오사카(新大阪) 간은 개통 50주년을 맞이하였다. 도쿄(東京) 올림픽 개막에 맞춰 1964101,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로 개통한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은 지금까지 50년 간 큰 사고를 하나도 일으키지 않고, 대량의 여객을 고속으로 수송하였다.

 

1. 1. 일본철도 개통

 

일본철도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후 관영(官營 : 정부운영)에 의해 건설을 결정하고, 메이지(明治) 5(1872) 1014, 신바시(新橋) ~ 요코하마(橫浜) 간을 연결한 것이 시작이다. 이것을 기념하여 후에 1014일을철도의 날로 제정하였다.

 

에도시대(江戶時代)부터 계속된 쇄국상태(鎖國狀態)에서 개국간(開國間)도 없는 당시의 일본은 구미(歐美) 각국에 공업력에서 크게 뒤쳐져 있었다. 철도건설에 대해서도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을 리 없고,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일본은 구미(歐美)로부터 기술적인 원조를 받게 되었다.

 

철도 자체의 시작은 분세이(文政) 8(1825)에 영국에서 화물철도의 운행이 시작된 것이 그 단서가 되었다. 거기에서 사용되었던 동력은 조지 스티븐슨의 발명에 의한 증기기관차였다. 영국은 철도 발상국으로써 기술적으로도 세계 속에서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일본도 철도를 부설함에 있어 그 힘을 빌리게 되었다.

 

일본은 영국에서 철도부설에 관해 여러 가지를 수입하게 되었다. 철도에 불가결한 기관차나 선로라고 하는 하드 면 뿐만이 아니라, 기관사나 열차 다이어 작성의 실무를 실시하는 기술자 등 소프트 면이나 인적수입(人的輸入)도 동시에 행해졌다.

 

단 하나, 영국에서 수입되지 않은 것이궤간(軌間)이다. 영국 본국의 철도는 1,435(4피트 8.5인치) 현재로 말하면표준궤(標準軌)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보다 좁은 1,067밀리(협궤)를 채용하였다. 일본이 협궤를 채택한 것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후에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1. 2. 정쟁 도구로 다뤄진 개궤논쟁

 

1872년에 개통한 일본철도는 그 후 순조롭게 걸음을 진행하여 수송량도 서서히 증가하여 갔다.그러면 궤간문제(軌間問題)가 대두하게 되었다. 구미(歐美) 여러 나라에서 채용되고 있는 표준궤(標準軌)와 비교하면 일본이 도입한 협궤(狹軌)는 열차속도나 수송력 면에서 뒤떨어진다. 철도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도 협궤를 그만두고 표준궤로 개궤(改軌)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러일전쟁(日露戰爭)이 끝난 후 더욱 커졌다.

   

       

   3선 궤조(軌條)(좁은 쪽이 협궤(1,067) 넓은 쪽이 표준궤(1,435)이다)

 

개궤론자(改軌論者)로 유명한 것이 고토 신페이(後藤 新平) 씨이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의해 얻은 남만주 철도(南滿州 鐵道 = 滿洲鐵道)의 초대 총재에 오른 고토(後藤) 씨는 만철(滿鐵)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철도도 표준궤(標準軌)로 개궤(改軌)해야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협궤(狹軌)의 건설을 계속해 노선망의 확충을 도모하는 것이 선결이다라는 의견도 뿌리깊게 있었다. 개궤논쟁(改軌論爭)은 이후 오랫동안 정쟁의 도구로도 다뤄지게 된다.

 

결국 일본철도는 궤간(軌間)을 변경하지 않고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다이쇼(大正) 8(1919), 귀족원(貴族院) 특별위원회에서 표준궤(標準軌)는 불필요하다라는 견해가 나왔고, 궤간변경(軌間變更)에 관한 논쟁은 여기서 일단 종지부를 맞이한다. 그러나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지났을 무렵이 되면서 전쟁에 따른 수요증가 등도 요인으로 일본의 대동맥인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과 산요 혼센(山陽 本線)의 수송력은 부족하였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탄환열차 계획(彈丸列車 計劃)이다.

 

탄환열차(彈丸列車)는 수송력이 부족하고 있는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과 산요 혼센(山陽 本線)을 증선(增線, 선로 수를 늘림) 프로그램에서 쇼와(昭和) 14(1939)에 특별조사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장에 취임한 것이 표준궤(標準軌)에 강한 의욕을 가진 시마야스 지로(島安 次郞) 씨에서 계속 맴돌던 개궤론(改軌論)이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을 의미하였다.

 

 

2. 전시색(戰時色)으로 물든 탄환열차 계획


2. 1. 전시의 철도수송과 탄환열차 계획

 

이야기는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에서 조금 올라가지만, 쇼와(昭和) 6(1931)에 만주사변이 발발했으며, 이듬해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남만주 철도는 영업이 현격하게 펴져 쇼와(昭和) 9(1934)에는 유명한 특급열차아시아 호의 운행이 시작되기에 이르른다. 이 때 만철(滿鐵)의 이사(理事)에는 전후 신칸센(戰後 新幹線)의 개통에 큰 역할을 한 토고 신지(十河 信二) 씨가 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일본 본토에서 만주(滿洲)로 건너가 수송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쇼와(昭和) 12(1937) 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을 발단으로 일본은 중국과 전쟁상태로 돌입했다.당초부터 일본군은 이 싸움을 유리하게 추진하는 대륙으로 진군(進軍)은 가속했다 동시에 국내도 군수경기(軍需景氣)가 좋은 그 대동맥인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산요 혼센(山陽 本線)의 수송력은 군수수송의 증가도 함께 드디어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쇼와(昭和) 13(1939) 철도성(鐵道省) 내 칙령(勅令)으로 인한 철도간선 조사회관제가 공포되어 철도간선 조사위원회가 발족, 도카이도(東海道산요 혼센( 山陽 本線)의 수송력 증강에 관한 구체적인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광궤(廣軌, 標準軌)별 증선(增線)을 실시하여 수송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재래선에 맞춰 협궤 별선으로 신선을 부설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육군에서 "보다 고속으로 달릴 수 있고, 높은 수송력을 구한다"는 강한 희망도 있어 표준궤를 채용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남들이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으로 알려졌다.

 

또 이 계획에는 장래적으로 시모노세키(下關) ~ 부산(釜山) 간 해저(海底)터널을 통해 도쿄(東京) ~ 조선(朝鮮) ~ 만주(滿洲)를 지나 베이징(北京)까지 직통운전을 실시하는 장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덧붙여 둔다.

 

2. 2. 탄환열차 계획개요

 

탄환열차 계획(彈丸列車計劃)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재래선과는 별도로 표준궤(標準軌)의 복선을 도쿄(東京) ~ 시모노세키(下關) 간에 부설

기관차견인 객차열차 운행

도쿄(東京) ~ 시즈오카(靜岡) 간은 직류 3,000V에서 전철화, 전철화구간은

최고속도 200km/h

시즈오카(靜岡) 서쪽은 대형 증기기관차로 견인, 최고속도는 150km/h

소요시간은 도쿄(東京) ~ 오사카(大阪) 4시간, 도쿄(東京) ~ 시모노세키(下關) 9시간

   

       

                     탄환열차 계획노선도

 

쇼와(昭和) 15(1940)이 되면서 제국의회(帝國議會)의 승인을 받아 용지매수 및 건설공사가 시작되었다. 용지는 전시(戰時)이기도 해 반강제적으로 행해져 급속한 진전을 보였다. 동시에, 난공사가 예상된 신단나(新丹那) 터널·히가시야마 (東山) 터널·니혼자카(日本坂) 터널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착공되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태평양 전쟁의 개전(開戰)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3. 탄환열차 계획이 신칸센에 미친 영향


3. 1. 미완성으로 끝난 탄환열차 계획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은 쇼와(昭和) 15(1940)에서 용지매수가 시작되면서 일부구간 착공되었으나 쇼와(昭和) 16(1941)에 개전(開戰)한 태평양 전쟁의 전국이 악화한 결과 1943[쇼와(昭和) 18]에 건설이 중단되었다.

 

 설계된 전용차량도 제작하지 않고, 반 강제적으로 진행된 용지매수에 도카이도(東海道) 구간은 전체의 1/4 정도가 완료되었지만, 착공되었던 공사는 중도에서 좌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쇼와(昭和) 20(1945) 814, 일본은 종전(終戰)을 맞아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은 미완성인 채로 한 번 종언(終焉)을 맞이하였다

 

착공했지만 대부분 공사가 중도에서 멈추어 버린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이지만, 시즈오카 현(靜岡縣)의 하나자와 야마(花澤山)을 지나 니혼자카(日本坂) 터널은 공사가 계속되어 쇼와(昭和) 19(1944)에 완성하였으며, 전후(戰後)에는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의 터널로 쇼와(昭和) 37(1962)까지 활용하였다. 또 시즈오카 현(靜岡縣)의 아타미(熱海) ~ 간나미(函南)를 연결할 예정이었던 신탄나(新丹那) 터널도 아타미구치(熱海口), 간나미구치(函南口)에서 각각 수 백미터를 굴착하였다.

 

3. 2. 탄환열차 계획이 신칸센에 미친 영향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계획이 표출된 것은 더욱 시대가 내려간 쇼와(昭和) 30년 대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탄환열차(彈丸列車) 계획은 적잖은 영향을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에 미쳤다.

 

 좋은 부분으로는 전시 중에 앞서 일부구간의 용지매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예산과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끝난 것을 들 수 있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접어든 신칸센(新幹線) 개통 전날 밤, 용지매수는 매우 어려웠지만, 만약 처음부터 용지매수를 하려고 했다면 용지확보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 틀림없다.

 

또 이미 완성된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에서 사용하고 있는 니혼자카(日本坂) 터널이 그대로 전용한 것이나 어느 정도 굴착된 신탄나(新丹那) 터널이 있었기에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전체의 공기(工期)가 크게 단축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반대로 탄환열차(彈丸列車)의 노선을 살펴보면서 현재 신칸센(新幹線)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도 있다. 조기에 착공한 신탄나(新丹那) 터널에서 부터 아타미(熱海) 역부근에 이르기까지 선형(線形, 노션형상)이 나빠 최소 곡선반경이 1,500m나 되어 현재 신칸센(新幹線)의 속도향상에 큰 장벽이 되고 있다.

 

탄환열차(彈丸列車)가 계획한 당시 철도차량이 시속 300km 이상 고속으로 달리는 것은 예상 불가능하여 아타미(熱海) 역 인근 반경이 1,500m 곡선은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기술혁신에 의해 시속 300km 이상으로 주행할 수 있는 차량이 개발하게 되면 이 아타미(熱海) 역 부근에 존재하는 급곡선(急曲線)이 속도향상하는데 지장을 주고 있다.

 

 

4.전후 철도 여객 수송


4. 1. 불탄자리 복구와 진주군 전용열차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終戰)을 맞아 일본은 전후(戰後) 부흥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불탄 자리에서 복구해 가는 단계에서 전후(戰後)의 철도 여객수송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었는 지를 되돌아 보자.

 

 일본철도는 전쟁 중에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전쟁터에서 철수한 군인과 소개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등 수요는 떨어지지 않고 쉴새없이 계속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크고, 조악(粗惡)한 재료를 이용한 간소한 "전시설계(戰時設計)"의 차량은 여러 가지 사고가 났으며, 극단적인 연료부족도 있어 열차운행은 큰 폭으로 방해되었다.

 

 또 전후(戰後) 7년 간 일본은 진주군(進駐軍)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동안 진주군(進駐軍) 전용차량이나 열차가 정비되어 진주군(進駐軍) 수송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제공된 차량은 기본적으로 흰 띠를 창가에 감아 외관에서도 쉽게 판별이 가능했다.

 

 일본인이 타는 차량은 정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재료부족으로 인해 유리창이 없었고, 좌석조차 없었던 차량도 많이 존재했지만, 진주군(進駐軍) 전용차량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비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식당 차(食堂車) 등을 연결한 호화로운 편성도 존재하였다.

 

4. 2. 쇼난덴샤(湘南電車) 誕生

 

그 후에도 석탄사정(石炭事情)의 악화 등 수요는 어려웠지만,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는 일본철도에 있어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었다. 그래도 쇼와(昭和) 24(1949)일본 국유철도가 발족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대규모 열차 다이어 개정이 이루어져 특급열차평화(平和)()가 도쿄(東京) ~ 오사카(大阪) 간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전후(戰後) 최초가 되는 특급열차의 부활이다.

 

 같은 해 2월에는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의 누마즈(沼津) ~ 시즈오카(靜岡) , 5월에는 하마마츠(浜松)까지 전철화가 완료하였으며, 연말에는 80()쇼난형(湘南型) 전차(電車)가 등장하였다.

   

        

    오사카(大阪) 교통과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80계 쇼난전차(湘南電車)

 

그때까지전차(電車)는 단거리 수송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80()는 국철(國鐵)에서 최초로 중간 전동 차 방식을 채용하여 장대 고정편성(최대 16량 편성하물전차 포함. 120m로 환산하면 1편성은 320m나 된다.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전차열차), 도쿄(東京) ~ 누마즈(沼津) 간 장거리를 수송하였다.

 

객실 서비스는 그때까지 장거리 수송을 실시하고 있던 객차열차와 손색없고, 또 전차방식(電車方式)이 되었기 때문에 종단(終端) 역에서 반복시간(反復時間)이 단축(기관차 교체가 불필요)되어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80()의 등장이 일본철도에 미친 영향은 컸으며, 전차(電車)의 장거리 수송 가능성을 찾아 그것이 나중 신칸센(新幹線)으로 연결되었다.

 

 

5. 전후 도쿄 ~ 오사카 간


5. 1. 쓰바메() 호 부활

 

전후(戰後) 도쿄(東京) ~ 오사카(大阪) 간의 수송은 쇼와(昭和) 25(1950)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특수(特需) 등도 있어 급속한 발전을 보였다. 쇼와(昭和) 24(1949)이 되어 본선의 전철화 구간이 늘어나면서 전후(戰後) 최초로 특급열차평화 호(平和號)가 운행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 평화 호(平和號)제비 호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전쟁 전에 존재했던 초특급 열차츠바메(제비의 의미, )()의 부활이다.

 

쇼와(昭和) 5(1930)에 운행이 시작된 초특급열차츠바메(제비의 의미)()C51·C53형 증기기관차로 견인하여 도쿄(東京) ~ 오사카(大阪) 간을 8시간(운행개시 당초는 8시간 20분 소요)이 소요되었다.

 

전후(戰後) 부활한츠바메(제비의 의미)()는 말에는 미치지 않고 9시간 운전으로 운행을 개시하였다. 또 남만주 철도(南滿州 鐵道)의 특급열차 이름이었던하도(비둘기의 의미)()쓰바메(제비의 의미) 호 자매열차로써 같은 구간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급행열차은하(銀河)()도 운행을 시작하므로써 도카이도 혼센(東海道 本線)은 활황을 되찾고 있었다.

 

쇼와(昭和) 25(1950)에 열차 다이어 개정이 이루어죠츠바메(제비의 의미)()하도(비둘기의 의미)()는 전쟁 전의 수준인 8시간으로 도쿄(東京) ~ 오사카(大阪) 간을 운행하게 되었다.

 

하도(비둘기의 의미)()츠바메(제비의 의미) ()는 최후미(最後尾)에 일등 전망 차를 연결하고쓰바메 걸(girl)하도 걸(girl)이라고 하는 여성 승무원을 수행 안내하는 등 서비스 면에서 향상시켰으며, 본선(本線)의 간판 특급열차로 시대를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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