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5 (화)

  • -동두천 -2.3℃
  • -강릉 -0.4℃
  • 맑음서울 -1.6℃
  • 맑음대전 -0.5℃
  • 맑음대구 0.9℃
  • 맑음울산 1.3℃
  • 구름조금광주 2.3℃
  • 맑음부산 2.9℃
  • -고창 0.0℃
  • 구름많음제주 6.4℃
  • -강화 -2.7℃
  • -보은 -2.0℃
  • -금산 -1.1℃
  • -강진군 2.7℃
  • -경주시 0.7℃
  • -거제 3.3℃

사람 & 사람

사람 & 사람, (사)철우회 김재근 전 수석부회장 편

사람 & 사람 (사)철우회 김재근 전 수석부회장 편

 

 

Q. 수석부회장님께서 철도와 인연을 맺은 동기는 무엇이며, 평생 철도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인생에 있어서 철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유년시절부터 용산 철도관사에서 살았다. 이모부가 철도청의 공전(차량+전기)국장이었는데 더부살이를 했다.

고향이 경남 함양 수동인데 4살 때 부친이 작고하셨다. 당시 부친은 수동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셨는데 돌아가시면서 동업자에게 양조장을 다 빼앗기다시피 했고, 우리집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당시 모친은 살림살이는 그대로 둔 채 우리 형제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가 이모부가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 이모부 철도 관사에서 방 한칸을 얻어 우리 가족은 살았다. 형은 운수학교를 다니고 나는 용산국민학교를 다녔다. 자연스레 기차 기적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성장했고 기차를 만져보고 접촉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 때부터 운명적으로 철도와 인연이 된 것 같다.

국민학교를 서너군데 다녔다. 함양 수동에서 진주로 서울로 전학을 다닌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유는 바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부를 좀 해서 5학년 때 운수학교로 진학(월반)을 했다.

형은 차량분야, 나는 전기쪽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1947년) 첫 근무지로 부산공작창 전기공장에서 시작했다.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철도는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인연이 있었으며, 평생 철도인으로 살게 되었다.

살 수 있게 해준 철도에 대한 고마움도 고마움이지만, 철도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

철도청의 배려로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위탁생으로 천거되어 전기공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에는 전철 보다는 디젤동력의 개념이 강했다. 당시 전철과에서 근무했는데 디젤동력과 전기철도의 갈등, 차별이 아주 심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고 본다.

당시 디젤기관차가 2천마력이면 전철은 6천마력의 힘을 발휘했다. 거기다 레일과 바퀴와의 점착력 도 견인전동기의 직·병렬 연결방식 차이로 전철이 휠씬 뛰어났고(30%), 에너지 절약도 전철이 20%나 앞섰다.

디젤에서 전철화 사업이 앞당겨진 결정적인 요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이훈섭 청장).

1967년 산업선 및 수도권, 경부선 전철화에 대한 기술조사에 이어 산업선(중앙, 태백, 영동선) 및 수도권(경인, 경수, 경원선)의 전철화를 추진했다.

1972년 태백선(중산~고한), 1973년 중앙선(청량리~제천), 태백선에 이어 청량리~동해 320km 산업선이 개통되면서, 무연탄, 석탄, 시멘트 수송의 파동을 막았으며, 우리 경제성장을 견인하게 되었다. 수도권의 혼잡한 대중교통(버스)도 선진화 된 편리한 전철로 교통문화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1962년이던가. 전철화 사업을 위해 유럽, 일본 등 외국출장(연수, 세미나 참석 등)을 많이(30여회) 다녔다.

외국 출장 중 재미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80년대인가, 소련에서 전기철도 세미나가 열렸다. UN 기술원조, 외화 도입 등 전철화 사업을 위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세미나였었다.

당시 소련과 우리나라는 수교가 없었다. 공산주의의 심장부에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국가라 잘못되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철도청에서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유서를 써놓고 갔다.

절대 망명 같은 것은 없으니 만약 내가 귀국을 못하게 되면 그건 전적으로 내 뜻이 아니다.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라는 뜻에서 유서 같은 것을 써놓고 소련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간 체류하면서 대륙횡단 철도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전기국장만 7년하다가 후배들을 위해 1990년 6월 퇴직했다. 녹조근조훈장, 산업포장을 받았다.

퇴직 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난 전기 관련 개인 회사를 2개나 설립, 열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Q. 수석부회장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전기동우회장 17년, 10여년 넘게 철우회 수석부회장직을 수행하신 모습을 보면 인품이나 대인관계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지요?

 

A. 철도 종사자들이 순수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입이 많이 거친 편이다.

그러나 난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자식한테도 ‘해라’는 잘 안하는 성격이다. 직원들한테 지시가 아니라 일을 스스로 하도록 했다.

무슨 일이든 사전 준비가 철저했다. 그래서 장관들(청장)이 같이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외국의 선전철도기술을 벤치마킹 많이 했다. 특히 외국인들의 처세술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1974년인가 계장 시절, 현직에 있으면서 전기동우회를 후원하였으며, 당시에는 전우회라고 했다. 나중에 철도전기동우회로 개명했다. 준회원, 정회원제 도입을 처음 시작했다. 현직에 있는 철도인을 준회원으로 등록토록 하여 회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동우회, 전기인들의 친목과 단합을 위하여 기금 1억을 목표로 열심히 활동했다. 회장으로서 끝내 1억은 모으지 못하고 8천만원까지 모아서 후배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었다. 1998년 전기철도기술협력회도 내가 만들었다. 전기철도 기술 자격증 소지자 1호 주인공이기도 하다.

 

 

Q. 사단법인 철우회에서 11년간(2003년~2014년) 수석부회장의 업무를 수행하셨는데, 가장 큰 보람과 철우회를 이끌어가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요?

 

A. 철도가 없었다면 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일평생 살았다.

자기가 몸 담았던 철도를 떠났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도 사람들은 순수하고 가족 같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언제든 철도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것이 나의 오랜 바램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사)철우회는 나의 욕구를 총족시켜주는 안성맞춤이다. 철우회 수석부회장을 맡으면서 4명의 회장님을 모셨다.

철도사람들 중 약 60%는 철우회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더 많은 철도인들이 철우회원으로 참여하고 활동 할 수 있도록 철우회의 집행부(후배들)가 리드해주길 기대한다.

 

난 가끔 묻고 싶다.

코레일의 꿈이 무엇인지? KTX가 나오고 꿈이 없어진 것 같다. 코레일은 KTX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꿈을 가져야 한다.

철도는 국가 기간산업이라 흑자를 볼 수가 없다. 국가가 어느 정도는 재정지원을 책임져야 한다.

일본의 경우, 고속철도 이후 장거리 자기부상열차를 실용화하고 있다. 우리도 짧은 거리 시험운행만 할 게 아니라 빨리 실용화 시키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 철도의 미래, 비전이 있어야 한다.

 

 

Q. 철우산악회 활동, 일본 철도인들과의 교류 등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평소 어떻게 건강을 관리하며 그 노하우는 무엇인지요?

 

A. 철우산악회가 '89년도 창립했다. 그 전에(1983년) 한국철도산악연맹 회장(13대~16대)을 맡았다. 일본·대만 철도산악연맹과 결연을 맺어 철도산악인 국제교류를 시작했으며, 2015년 지금도 한국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내가 회장 할 때, 최연혜 차장은 꼭 참석하여 격려해주었다.

 

아침 6시, 헬스, 수영, 3km 러닝을 한 지가 한 30년 됐나...아무튼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왔다.

수영(평형)의 경우, 고등학교 때 선수였다.

술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고 많이 마신다. 술잔 돌리기가 내 주특기이다. 철우산악회장 할 때에도 내 술잔 안받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술잔 돌리기가 단순한 행위지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잊지 않게 해준다. 위스키, 소주, 맥주...주종은 안가린다.

산업선 전철건설 출장 때던가. 독일 철도인과 술 많이 마시기 내기를 해서 이긴 적도 있을 정도로 나 역시 술을 좋아한다.

등산열차를 내가 기획했다. 노무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과 등산열차에서 만나 술 한잔 나눈 에피소드도 있다.

술을 좋아하지만 술 체질은 아니다. 아들은 술을 한잔도 못마신다.

키 178cm에 체중은 82~85kg을 늘 유지한다.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며, 참다운 인생의 가치-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가족은 1남 3녀이고 집사람이 있다.

집사람과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10년간 교제, 결혼했다. 집사람은 범띠(O형)이고 나는 쥐띠인데, 우리는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부부간에 불평이 있으면 오픈해야 한다. 가슴에 쌓아두면 안된다. 대화가 오래 끊어지면 안된다. 설령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남자(남편)가 먼저 말을 하는 것은 수치도 자존심도 아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아내한테 무릎을 꿇는 것은 진정한 남자(남편)의 용기이지, 자존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도를 걸어야 한다. 나이를 먹더라도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할 일이 없으면 집안의 화초를 정성껏 관리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건강비결이고 잘 사는 비결이다. 스스로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

 

취미생활은 비디오 같은 무비카메라(영사기 촬영, 캠코더 등)를 가지고 촬영하는 것이다. 4명의 자녀들 내가 어릴 때부터 무비카메라로 다 찍어 영상DVD을 만들어줬다. 지금은 필름-비디오테이프-디지털-DVD-메모리디스켓으로 작업해 둘 정도로 난 무비카메라에 관심이 많았고, 웬만한 영화감독 만큼 영상에 대해서는 더 잘 찍을 자신 있다.

이러한 내 취미활동은 일본, 유럽친구들도 알고 있다.

집안의 전기는 지금도 내가 다 만진다. 필라멘트 전구, 손전등 전구까지 LED교체 다 내가 했다.

나이를 먹어도 움직여야 한다. 그게 건강비결이다.

 

 

걸어온 길

 

김재근

1936년 9월 5일 경남 거창 출신

1954년 교통고등학교 전기과 졸업

1954년 철도청 부산철도차량 정비창 근무

1962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1973년 녹조근정훈장

1983년~1990년 철도청 전기국장 역임

1983년~1990년 한국철도산악연맹 회장

1995년~1999년 (재)한국철도기술공사 부이사장

1998년~2013년 (사)한국전기철도기술협력회 회장

1998년~2015년  철도전기동우회 회장

2004년 산업포장

2003년~2015년 (사)철우회 수석부회장

1999~2006년 (주)한국이알시 대표이사

 

 

에필로그

 

시원시원한 성격

철도를 애인만큼이나 사랑하는 영원한 레일맨

서글서글한 인상

너털웃음이 보는 사람을 기분좋게 해주는 男子

김재근

 

권위의식은 처음부터 없었다

오로지 사람, 사람을 있는 그대로 편하게 대해주는 휴먼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쟁취한 은근과 끈기의 로맨티스트

 

보여지는 카리스마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보다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남자

그 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용해되어 전해지는 아름다운 카리스마

 

술 한잔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眞情

 

언제나 큰집처럼 큰형님처럼

믿음과 義理

깊어가는 가을밤

님과 술 한잔 하면서

술벗되어 나누는 정담도 인생에서 흔치 않은 쾌락이리라!

 

 

 

 대담 : 배임규 편집장

 글 · 사진 장태창 기자 02-795-9430 / 010-8943-6843 

 

배너
배너

포토




철도전문 매거진에 대한 의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